맨위로가기

이시카와 다쿠보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1886년 일본 이와테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시인이자 작가이다. 그는 단가 시집과 일기를 통해 작품 활동을 펼쳤으며, 낭만주의 문학에 영향을 받아 문학에 입문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시집 『아코가레』, 『모래 한 줌』, 『슬픈 장난감』 등이 있으며, 특히 『모래 한 줌』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고토쿠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평론을 쓰기도 했다. 다쿠보쿠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은 일본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의 시인 백석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교정 - 교정 (출판)
    교정은 출판 과정에서 원고를 정리한 후 인쇄물 형태로 상품화하기 전 최종 점검하는 작업으로, 인쇄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 교열 작업을 포함하여 출판물의 완성도를 높이고 오류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교정 - 오식
    오식은 인쇄 과정에서 발생하는 식자 오류, 오기, 오타, 오변환 등의 오류를 의미하며, 사회적, 법적 논쟁을 야기하거나 새로운 표현으로 정착하거나 창작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 일본의 교사 - 가네마루 신
    가네마루 신은 일본의 정치인으로, 중의원 의원 13선, 방위청 장관, 건설대신, 국토청 장관, 자민당 간사장,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자민당의 주요 파벌을 이끌었으나 사가와큐빈 사건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 일본의 교사 - 야마나카 사다노리
    가고시마현 출신 중의원 의원이었던 야마나카 사다노리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여러 장관직을 역임하며, 특히 자민당 세제조사회장으로서 소비세 도입을 주도하여 '세제의 신'으로 불릴 만큼 세제 분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 모리오카시 출신 - 미하라 요코
    미하라 요코는 1951년 배우로 데뷔하여 신토호의 섹시 라인 톱스타, 도에이 핑키 폭력 장르의 주요 여배우로 활동하며 다수의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고 부동산 사업으로도 성공한 일본 배우이다.
  • 모리오카시 출신 - 오시마 타카토
    오시마 타카토는 일본 모리오카 출신의 근대 제철 기술자로, 란학 및 채광 기술을 습득하여 일본 최초의 상용 고로를 완성하고 일본 광업계 발전에 기여하여 "일본 근대 제철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시카와 다쿠보쿠 (石川 啄木)
로마자 표기Ishikawa Takuboku
다른 이름이시카와 하지메 (石川 一)
출생일1886년 2월 20일
출생지이와테현, 일본 제국
사망일1912년 4월 13일
직업시인
작품 스타일
신체시신체시(新体詩)
자유시자유시(自由詩)

2. 생애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1886년 이와테현 미나미이와테군 다마야마촌(현 모리오카시 다마야마)에서 아버지 이시카와 잇테이(石川一禎)와 어머니 가쓰(カツ)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1] 본명은 이시카와 하지메(石川一)였으나, 호적상으로는 어머니의 성을 따른 구도 하지메(工藤初)였다.[2]

1887년, 아버지가 시부타미 마을(현 모리오카시 시부타미)의 호토쿠지(宝徳寺) 주지로 부임하면서 가족이 이주했다.[3] 1891년, 시부타미 보통소학교(현 모리오카시립 시부타미 소학교)에 입학했고,[7] 1895년에는 모리오카시의 모리오카 고등소학교(현 모리오카시립 시모하시 중학교)에 입학했다.[8] 1898년, 이와테현 모리오카 보통중학교(현 이와테현립 모리오카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호리아이 세쓰코, 오카야마 후이, 긴다이치 교스케 등을 만났다.[9]

1900년, 문예지 『명성』의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11] 1901년에는 『三日月』, 『爾伎多麻(니기타마)』 등의 회람 잡지를 편집하고, 단가 모임 ‘백양회(白羊会)’를 결성, 이와테 신문과 이와테 매일 신문에 단가와 평론을 발표했다.[13][14] 1902년, 중학교를 자퇴했다.[5][6]

1907년 5월 4일, 홋카이도로 이주하여 하코다테에서 생활했다.[1] 하코다테 구립 야요이 심상소학교(현 하코다테 시립 야요이 소학교) 교원, 하코다테 일일 신문사 기자 등으로 일했다.[5][8] 8월 25일 하코다테 대화재로 직장을 잃고, 삿포로, 오타루, 구시로 등지를 전전하며 기자 생활을 했다.[10]

1908년 4월 28일, 도쿄로 상경하여 신시샤에 잠시 머물렀다.[15] 긴다이치 교스케의 도움으로 혼고 기쿠사카초의 아카코코로칸(赤心館)에 거주하며 소설 집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6][19] 1909년 3월 1일, 도쿄 아사히 신문 교정 담당으로 채용되었다.[25] 6월에는 가족들이 도쿄로 와 함께 살게 되었으나, 생활고와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10년, 건강이 악화되었고, 1912년 1월에는 어머니 가쓰가 결핵으로 사망했다.[1] 결국 1912년 4월 13일, 폐결핵으로 사망했다.[1] 그의 나이 26세였다.[1]

2. 1. 출생과 성장 (모리오카)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1886년 이와테현 미나미이와테군 다마야마촌(현 모리오카시 다마야마)에서 조코지(常光寺)의 주지였던 아버지 이시카와 잇테이(石川一禎)와 어머니 가쓰(カツ)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1] 본명은 이시카와 하지메(石川一)였다. 아버지가 승려였기 때문에 호적상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아, 어머니의 사생아로 신고되어 어머니의 성을 따른 구도 하지메(工藤初)가 본명이었다.[2] 호적에는 1886년 2월 20일 출생으로 되어 있으나, 다쿠보쿠가 시고 노트 『황초집(黄草集)』에 “메이지 19년 2월 20일생(18년 구 9월 20일)”이라고 적은 괄호 안의 날짜를 덴포력의 날짜로 보고 이를 태양력으로 환산한 1885년 10월 27일에 태어났다는 견해도 있다.[3]

1887년, 아버지가 시부타미 마을(현 모리오카시 시부타미)에 있는 호토쿠지(宝徳寺) 주지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쿠보쿠의 가족도 그곳으로 이사했다.[3]

1891년, 다쿠보쿠는 학령보다 1년 빠르게 시부타미 보통소학교(현 모리오카시립 시부타미 소학교)에 입학했다.[7] 소학교 2학년 때인 1892년 9월, 아버지는 어머니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고, 다쿠보쿠도 이시카와 성을 따르게 되었다.[2] 1895년, 시부타미 보통소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모리오카시의 모리오카 고등소학교(현 모리오카시립 시모하시 중학교)에 입학하여 시내 외가 삼촌 집에 기거했다.[8]

1898년, 이와테현 모리오카 보통중학교(현 이와테현립 모리오카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9] 입학 시험 성적은 128명 중 10등이었다.[9] 중학교에서 그는 훗날 아내가 되는 호리아이 세쓰코(堀合節子)와 오카야마 후이(岡山不衣), 긴다이치 교스케(金田一京助) 등을 만났다. 3학년 무렵에는 해군 지망 열풍에 동조하여 선배인 오이카와 고시로를 따르기도 했다.[10]

1900년, 낭만주의 시가 작품으로 유명했던 문예지 『명성』의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1] 단가를 짓기 시작한 다쿠보쿠는 선배 키타니시 쿄스케의 소개로 『명성』을 접하고, 1901년 3월경 신시사(新詩社) 사우(社友)가 되었다.[4] 3학년 말에는 교사 간 분쟁에 대한 학생 파업에 참가하기도 했다.[12]

1901년, 교내 문예 활동을 활발히 하며 『三日月』, 『爾伎多麻(니기타마)』 등의 회람 잡지를 주재·편집하고, 단가 모임 ‘백양회(白羊会)’를 결성했다.[13] 이와테 신문과 이와테 매일 신문에 단가와 평론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활자화된 작품을 남겼다.[14]

1902년, 5학년(최종 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고, 결석이 잦아 불합격이 확실해지자 10월 27일 중학교를 제적(자퇴)했다.[5][6] 제적 전, 『명성』 10월호에 ‘백빈(白蘋)’이라는 필명으로 단가가 게재되었다.[4]

다쿠보쿠는 보통중학교에서 공부보다 연애문학 활동을 우선시하여 성적이 계속 떨어졌다. 그는 유급을 피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고, 학교가 나쁘다는 이유로 자퇴하는 등 현실 회피적인 모습을 보였다.

2. 2. 홋카이도 방랑

1907년 5월 4일,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시부타미를 떠나 5일에 하코다테에 도착했다.[1] 홋카이도로 건너간 것은 오타루에 거주하는 이복 누나 도라의 남편 야마모토 센자부로(당시 홋카이도 철도 오타루 역장)가 미쓰를 데려가겠다고 제안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2] 하코다테에서 다쿠보쿠는 마쓰오카의 하숙집에 기거하는 한편, 처자는 모리오카의 친가에, 어머니는 시부타미의 이웃 마을에 사는 지인에게 맡겨 독신 생활을 했다.[3] 5월 11일부터 5월 말까지, 보쿠슈쿠샤 동인 사와다 신타로의 도움으로 하코다테 상공회의소에서 임시 고용으로 생계를 유지했다.[4] 6월, 보쿠슈쿠샤 동인 요시노 하쿠손의 주선으로 하코다테 구립 야요이 심상소학교(현 하코다테 시립 야요이 소학교)의 대용 교원이 되었다.[5] 7월 7일에 처자를 불러들여 하숙을 나와 새 거처로 이사했다.[6] 8월 4일에는 어머니를 맞이하여 일가가 모였다.[7] 같은 무렵 미쓰도 오타루에서 하코다테로 와, 가계에 보탬을 주고자 다쿠보쿠는 대용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하코다테 일일 신문사의 유군 기자가 되었다.[8] 신문에는 자신이 선자인 가단을 설치하거나 수필을 연재하는 등 일에 몰두했고, 『紅苜蓿』 편집에도 열중했다.[9] 보쿠슈쿠샤 멤버와 친분을 쌓았으며, 특히 미야자키 이쿠와는 사망 전년까지 교우를 맺었다.

그러나 8월 25일 하코다테 대화재로 인해 근무처인 소학교와 신문사가 모두 소실되었다.[10] 다쿠보쿠는 교원으로 재직 중이었지만, 무자격자를 정리한다는 소문이 돌아 다시 생계 수단을 잃는 곤경에 처했다.[11] 이 상황에서 삿포로로 이주했던 보쿠슈쿠샤 동인 무카이 에이타로가 직업을 찾아, 친구인 호쿠몬 신보 기자 고쿠니 로도를 통해 교정계에 채용되었다.[12] 9월 13일 단신으로 하코다테를 떠나 다음 날 삿포로에 도착, 16일부터 근무했다.[13] 재직 중 다쿠보쿠는 고쿠니로부터 사회주의에 대한 설득을 받고, 이전의 "냉소"적인 태도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찬동할 수밖에 없다"라고 적었다.[14] 그 직후, 고쿠니의 권유로 새로 창간되는 오타루 니포 기자로 채용되어 9월 27일에 오타루로 이사했다.[15] 오타루에는 다쿠보쿠보다 먼저 처자와 미쓰가 이복 누나 집으로 이사해 왔고, 다쿠보쿠도 합류하여 다시 일가가 모였다.[16] 곧 다쿠보쿠와 처자는 임대 주택으로 이사했다.[17] 오타루 니포에는 다쿠보쿠보다 먼저 노구치 우조가 동료로 있었다.[18] 다쿠보쿠는 함께 3면을 맡은 우조와 친교를 맺고,[19] 함께 주필 배척 운동을 일으켰다.[20] 그러나 주필 측의 반격으로 우조 혼자 퇴사하게 되었다.[21] 다쿠보쿠는 한때 우조가 악의를 품었다고 오해했지만, 우조가 사과한 후 퇴사하고 자신이 3면 주임으로 임명되자 주필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22] 이후 다쿠보쿠의 운동으로 주필은 해임되었다.[23] 후임 편집장으로는 홋카이도청에 입청하여 삿포로로 이주했던 사와다 신타로가 다쿠보쿠의 요청을 받고 취임을 쾌락했다.[24]

편집장이 바뀐 오타루 니포에서 다쿠보쿠는 일에 전념했지만, 영업 실적이 오르지 않는 오타루 니포의 미래를 의심하고, 고쿠니로부터 삿포로에 새로운 신문이 창간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삿포로로 통근했다.[25] 이 일로 사내 사무장(훗날 중의원 의원이 되는 나카노 도라키치, 당시에는 고바야시 성)과 분쟁이 생겨 폭력을 당하고 12월 16일 퇴사한다.[26]

1908년 1월 4일, 오타루 시내 "사회주의 연설회"에서 니시카와 고지로 등의 강연을 들었다. 한편 구직 활동은 난항을 겪었고(삿포로의 신문은 창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편집장 사와다가 홋카이도 의회 의원이자 오타루 니포 사장 겸 구시로 신문(현재의 구시로 신문사와는 무관, 현재의 홋카이도 신문사) 사장인 시라이시 요시로에게 부탁하여 다쿠보쿠의 재능을 눈여겨본 시라이시 덕분에 구시로 신문 취직이 결정되었다. 가족을 오타루에 남겨두고 1월 19일 구시로로 출발했다. 1월 21일 도착, 사실상의 편집장(주필은 따로 있었다)으로서 지면을 맡아 필력을 발휘하여 독자를 늘렸다. 취재를 위해 화류계에 출입하여 게이샤 고누와 친분을 맺고, 처음으로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 문단에서 멀리 떨어진 구시로에서의 기자 생활에 초조함을 느끼고, 구시로를 떠나 창작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3월 20일부터 병을 핑계로 결근하고, 28일에 사장 시라이시로부터 병이 낫지 않는다는 전보를 받고 구시로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4월 5일 구시로를 떠나 배편으로 하코다테로 가서 하코다테 일일 신문에 근무하며 상경 비용을 벌고자 했다. 미야자키 이쿠는 다쿠보쿠의 이러한 생각을 듣고 창작 의욕에 보답하고자 상경 자금을 지원하고, 처자를 위한 집을 하코다테 시내에 마련해 주었다. 다쿠보쿠는 4월 24일 단신으로 요코하마행 배에 올라, 약 1년간의 홋카이도 생활을 마무리했다.

2. 3. 도쿄에서의 문필 활동과 사회주의

1908년 4월 28일부터 도쿄 센다가야의 신시샤에 잠시 머물렀다.[15] 5월 2일, 요사노 데칸과 함께 모리 오가이 자택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했다.[15] 5월 4일, 중학교 선배인 긴다이치 교스케의 도움으로 혼고 기쿠사카초의 아카코코로칸(赤心館)에 거주하게 되었다.[16] 미야자키 이쿠에게 "석 달 또는 반년 안에" 가족을 도쿄로 부르겠다고 약속했기에, 소설 집필 및 판매를 시도했다.[17] 다쿠보쿠는 "소세키우미인초 정도는 2주 만에 쓸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지만,[18] 기타이치, 오가이,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의뢰한 소설의 잡지 게재는 모두 실패했다.[19] 생활고에 시달린 다쿠보쿠를 위해 기타이치가 자신의 옷을 전당포에 맡겨 12엔을 건네주어 잠시 위기를 모면했지만, 앞날은 불투명했다.[19] 6월 27일 일기에는 "사망한 구니키다 돗포나 자살한 가와카미 비잔은 죽을 수 없는 자신보다 행복하다"고 적었다.[17] 이 기간 동안 6월 23일부터 25일까지 "동해의 작은 섬…" "장난스레 어머니를 업고…" 등 훗날 널리 알려질 시 186수를 짓고,[20] 그중 114수를 다음 달 『묘조』에 발표했다.[21] 9월 6일, 기타이치의 주선으로 혼고 모리카와초 가이헤이칸으로 하숙을 옮겼다.[21]

신시샤의 친구이자 도쿄 마이니치 신문 기자의 주선으로 11월부터 「조에이」를 연재했지만(총 59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23]

11월에 『묘조』가 폐간되었으나,[24] 『스바루』 창간 준비에 계속 참여했다.

1909년(메이지 42년) 1월, 『스바루』가 창간되고 발행 명의인이 되었다.[24] 2월, 이와테현 출신 도쿄 아사히 신문 편집장 사토 호쿠에에게 직접 취업을 요청하여, 3월 1일 도쿄 아사히 신문 교정 담당으로 채용되었다.[25]

4월 3일부터 로마자 일기를 쓰기 시작,[26] 6월 16일까지 이어졌다. 한편, 어머니 카츠는 다쿠보쿠의 취직 소식에 도쿄에서 함께 살기를 희망하는 편지를 보냈고, 4월 13일에 도착했다. 그러나 다쿠보쿠는 빚 때문에 가족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자유로운 독신 생활과 가족 부양 사이에서 갈등하며 아사쿠사의 매춘부를 사는 일상을 보냈다.

5월 26일, 미야자키 이쿠가 가족의 도쿄행 여비를 지원하겠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6월 16일, 미야자키 이쿠의 동행으로 아내와 아이, 어머니가 하코다테에서 도착, 혼고 유마치의 이발소 "키노유카" 2층으로 이사했다. 1년 5개월 만의 가족 동거였지만, 아내 세쓰코는 하코다테 시절 시어머니와의 불화, 결핵 감염, 궁핍한 생활 등으로 다쿠보쿠에 대한 감정이 식은 상태였다.

세쓰코의 건강 악화에도 다쿠보쿠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개선되지 않았다. 10월 2일, 세쓰코는 유서를 남기고 딸 쿄코와 모리오카 친정으로 돌아갔다. 미야자키 이쿠 부부의 결혼식(10월 26일) 참석도 귀향 이유 중 하나였다. 다쿠보쿠는 긴다이치 교스케, 니토베 이나조 등에게 도움을 청하고, 결국 세쓰코는 3주 후인 10월 26일에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다쿠보쿠는 큰 충격을 받고, 현실에 직면하여 문학의 의미를 고찰하기 시작했다.

11월부터 아사히 신문사의 『니요테이 전집』 교정 담당을 맡게 되었다. 이는 주필 이케베 산잔의 배려였다.

12월 20일, 아버지 이치테이가 노베지에서 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10년(메이지 43년) 3월, 『니요테이 전집』 1권 교정을 마치고, 4월 퇴사한 학예부 기자의 후임으로 전집 출판 전반을 담당했다. 2권(11월 간행) 출판까지 거의 혼자 해내며 니요테이 시메이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2. 4. 질병과 죽음

1910년,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 생활을 했다.[1] 그해 5월 30일, 아내 세쓰코의 친정이 모리오카에서 하코다테로 이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쓰코는 친정에 가기 위해 다쿠보쿠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1] 하지만 다쿠보쿠는 돈의 출처를 속인 것에 화를 내며 고향에 간다면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결국 세쓰코는 고향 방문을 포기했다.[1]

7월, 다쿠보쿠는 일주일 동안 고열에 시달렸고, 세쓰코도 폐첨 카타르 진단을 받았다.[1] 8월 7일, 다쿠보쿠는 요양을 위해 고이시카와구 큐켄초(현재의 분쿄구 고이시카와 5-11-7)의 셋집으로 이사했다.[1] 이사 비용은 미야자키 이쿠우가 부담했다.[1]

9월에는 이쿠우가 세쓰코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다쿠보쿠는 이쿠우와도 의절했다.[1] 이 사건 이후 다쿠보쿠는 세쓰코에게 가계부를 쓰게 했다.[1] 12월, 다쿠보쿠는 고열에 시달렸고, 니요테이 전집 업무도 다른 직원에게 인계했다.[1]

1912년 1월, 어머니 가쓰마저 객혈과 기침 증세를 보이며 결핵 진단을 받았다.[1] 3월 7일, 어머니 가쓰가 사망하자 다쿠보쿠는 큰 충격을 받아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1]

결국 1912년 4월 13일 오전 9시 30분경, 다쿠보쿠는 고이시카와구 큐켄초 자택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1] 아내 세쓰코, 아버지 이치젠, 와카야마 보쿠스이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1] 그의 나이 26세였다.[1]

3. 주요 작품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단가 시집
  • * 아코가레(あこがれ, 동경) (1905)
  • * 一握の砂|잇카쿠노 스나|한 줌의 모래jp (1910)
  • * 悲しき玩具|가나시키 간구|슬픈 장난감jp (1912, 사후 출판)
  • 일기


1910년 4월, 다쿠보쿠는 사회부장 시부카와 겐지로부터 단가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시집 출판을 계획한다. 255수를 모아 『시고토노아토』(仕事の後, 일한 뒤)라는 제목으로 슌요도 쇼텐에 가져갔지만, 원고료 문제로 결렬된다.[19]

이후 다쿠보쿠는 고토쿠 사건(대역 사건)에 대한 평론 “소위 이번 일”과 “시대 폐색의 현상”을 집필했지만, 신문 게재에는 이르지 못했다.[20][21]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깊게 한 다쿠보쿠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문헌을 빌려 읽기도 했다.[22]

1910년 10월, 다쿠보쿠는 다시 시집 출판을 계획하고, 아즈마야도 서점에 원고를 가져가 출판 계약을 맺는다.[23] 원고는 『시고토노아토』였지만, 작품을 가감하고 삼행 분서기로 고친 후, 제목도 『한 줌의 모래』로 변경했다.[23] 1910년 12월 1일, 제1시집 『한 줌의 모래』가 간행되었다.[23]

그 외 전집은 다음과 같다.

  • 『다쿠보쿠 전집』(啄木全集, 신초사), 1919년(전3권)
  • 『이시카와 다쿠보쿠 전집』(개조사), 1928년 - 1929년(전5권)
  • * 1978년 노벨서방에서 복각
  • 『신편 이시카와 다쿠보쿠 전집』(개조사), 1938년 - 1939년(전10권)
  • 『다쿠보쿠 전집』(啄木全集, 가와데쇼보신샤), 1949년 - 1953년(전25권) ※전집으로서 처음으로 일기를 수록
  • 『다쿠보쿠 전집』(啄木全集, 이와나미쇼텐), 1953년 - 1954년(전16권)
  • 『다쿠보쿠 전집』(啄木全集, 쓰쿠마쇼보), 1967년 - 1968년(전8권)
  • 『이시카와 다쿠보쿠 전집』(쓰쿠마쇼보), 1978년 - 1980년(전8권)


아오모리현 오마 정 오마사키에 있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비


가이헤이칸 터에 서 있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비

4. 작품 세계 및 특징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퇴원 후에도 병상에서 생활하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18] 1910년 6월에는 장편시 "끝없는 논쟁 후에"를 집필, 잡지 『창작』에 발표했고, 두 번째 시집을 위해 『호자와 입가락』이라는 제목의 노트에 여러 편의 시를 썼으나 생전에는 발표되지 않았다.[18]

가족 및 지인과의 관계에서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아내 세츠코의 친정과는 관계가 악화되어 의절했고, 친구 미야자키 이쿠우와도 오해로 인해 의절했다.[18] 9월 이후 건강 악화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창작 활동이 거의 중단되었으나,[18] 11월에는 크로포트킨의 『러시아의 공포』를 필사했다.[20]

다쿠보쿠의 작품에는 그의 삶과 경험이 투영되어 있다. 다음은 그의 대표적인 시 몇 편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
제목내용비고
동해의 작은 섬...동해의 작은 섬의 바닷가 흰 모래 위에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희롱하네
오마사키에 시비가 있다.
모래 언덕의 모래에...모래 언덕의 모래에 배를 대고
첫사랑의
아픔을 멀리 떠올리는 날
코시가야 타츠노스케 작곡, "첫사랑"이라는 노래로 불린다.
생명 없는 모래의 슬픔이여...생명 없는 모래의 슬픔이여
사르르
쥐면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네
리쿠젠타카타(타카다마쓰바라) 시비 (쓰나미로 유실)[18]
뺨에 흐르는...뺨에 흐르는
눈물은 없지만
한 줌의 모래를 보여준 사람을 잊지 않으리
위 시비 유실 후 리쿠젠타카타에 세워진 시비[18]
장난치며 어머니를 업고...장난치며 어머니를 업고
그 너무나 가벼움에 울며
세 걸음 걷지 못하네
일하지만...일하지만
일하지만 아직 나의 생활은 편해지지 않네
꼼짝없이 손을 본다
벗들이 모두...벗들이 모두 나보다 훌륭해 보이는 날이여
꽃을 사다가
아내와 즐기네
고향 사투리가 그립다...고향 사투리가 그립다
역의 사람들 속에서
그것을 듣고 싶어 가네
우에노역에 시비가 있다.
어쩌면 시부타미 촌이...어쩌면 시부타미 촌이 그리운가
추억의 산
추억의 강
돌을 맞는 것처럼...돌을 맞는 것처럼
고향을 떠난 슬픔
사라질 때가 없네
부드럽게 버드나무 푸르르네...부드럽게 버드나무 푸르르네
키타카미 강변 눈에 보이네
울 것 같이
시부타미에 세워진 첫 시비
고향의 산을 향하여...고향의 산을 향하여
말할 것이 없네
고향의 산은 고맙구나



다쿠보쿠는 세츠코와의 연애 외에도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 하코다테 시절 동료였던 가쓰라 지에코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고,[18] 쿠시로 시절 교류했던 기생 코누를 소재로 한 단가를 남겼다.[18]

4. 1. 단가 혁신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전통적인 단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3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형식 안에 일상생활의 솔직한 감정과 경험을 담아내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시도는 당시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10년에 출간된 첫 번째 가집 『한 줌의 모래』는 다쿠보쿠의 단가 혁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가집에서 다쿠보쿠는 기존의 틀을 깨고 생활 속에서 느끼는 슬픔, 고독, 희망 등 다양한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1912년에 출간된 유작 가집 『슬픈 장난감』 또한 다쿠보쿠의 단가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창작열을 불태웠던 다쿠보쿠의 삶의 애환과 문학적 고뇌가 이 작품에 담겨있다.

4. 2. 사회주의 영향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1910년(메이지 43년) 무렵,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10년에 발생한 고토쿠 사건(幸徳事件)은 다쿠보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19] 이 사건을 계기로 다쿠보쿠는 사회주의 문헌을 탐독하고,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탐독했다.[20]

1910년 9월 9일에 쓴 단가에는 이러한 사회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당시 일본 제국의 한국 병합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난다.

地図の上 朝鮮国(てうせんこく)を 黒く塗り 秋風(あきかぜ)を聴(き)く|지도 위 조선(朝鮮) 땅을 검게 칠하며 가을바람을 듣네일본어

이 단가는 잡지 『창작(創作)』 메이지 43년 10월 단가(短歌) 특집호에 게재되었으나,[20]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에는 수록되지 않았다.[19]

1911년(메이지 44년) 11월에는 크로포트킨의 『러시아의 공포』를 필사하여 제본하기도 했다.[20]

4. 3. 로마자 일기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아내가 읽지 못하도록 일기의 일부를 라틴 문자로 일본어를 음역하여 적었다.[1] 1909년 4월 3일부터 로마자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1] 4월 7일부터는 새로운 노트에 "로마자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6월 16일까지 이어졌으며, 중간중간 끊기기도 했다.[12] "로마자 일기"는 다쿠보쿠 사후 70년 가까이 지난 1978년에 출간된 『이시카와 다쿠보쿠 전집』 제6권에서 처음으로 가려쓰기 없이 전문이 음역되어 공개되었다.[12] 이전까지 가려쓰기가 되었던 이유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3]

5. 평가 및 영향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일본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와 감정을 담아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특히, 그의 시는 일본 전통 시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하여 근대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쿠보쿠의 문학적 영향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에도 미쳤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 백기행은 다쿠보쿠의 시를 좋아하여 자신의 필명을 '백석'이라고 지을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26]

또한, 다쿠보쿠는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다뤄졌다. 애니메이션 '탐정사무소 우드패커'에서는 허구적인 이시카와가 등장하며,[26] 'Fate/Grand Order'와 '골든 카무이'와 같은 작품에도 등장한다.

다양한 작품에서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그의 아내 이시카와 세츠코 역을 맡은 배우들은 다음과 같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역

작품 종류작품 제목배우제작사감독비고
영화열정의 시인 탁목 고향편시마 코지닛카쓰쿠마가야 히사토라
영화구름은 천재다이케베 요시기획만. 크랭크인 전에 제1차 도호 노동쟁의로 제작 중단. 쇼치쿠, 도호의 경쟁 작품. 쇼치쿠 감독: 아시하라 마사시, 도호 감독: 야마모토 사쓰오
영화우리는 울며 헤어졌다와카하라 마사오쇼치쿠아시하라 마사시
영화젊은 날의 탁목 구름은 천재다오카다 에이지신도호나카가와 신오
영화열정의 시인 탁목혼고 코지로다이에이시마 코지
드라마사자처럼쿠니히로 토미유키TBS1978년 8월 21일 방영
드라마사랑, 믿고 싶소이다오쿠다 에이지NHK긴가 텔레비전 소설1981년 6월 방영
연극울보 건방진 이시카와 탁목히라타 미츠루코마츠자1986년 초연, 작: 이노우에 히사시[26]
영화꽃의 난스나가와 신고도에이후카사쿠 킨지
연극막돼먹은 탁목후지와라 타츠야미타니 코키2011년, 작·연출
연극울보 건방진 이시카와 탁목이나가키 고로시스 컴퍼니단다 야스노리2011년 10월 공연[26]
드라마아시오에서 온 여자와타나베 다이NHK2014년 1월 방영
역사비화 히스토리아미조바타 준페이NHK2016년 9월 16일 방영
연극우리는 울며 헤어졌다~이시카와 탁목~MARU사마 테쓰2015년 12월, 작: 히라야마 요
연극덧없이도 또한, 슬프게도MARU사마 테쓰2017년 12월, 작: 히라야마 요
영화이 길콘도 후쿠HIGH BROW CINEMA사사베 키요시
애니메이션딱따구리 탐정처아사누마 신타로


이시카와 세츠코 역

작품 종류작품 제목배우제작사감독
영화열정의 시인 탁목 고향편타키하나 쿠코닛카쓰쿠마가야 히사토라
영화구름은 천재다이이노 키미코
영화우리는 울며 헤어졌다츠시마 케이코쇼치쿠아시하라 마사시
영화젊은 날의 탁목 구름은 천재다와카야마 세츠코신도호나카가와 신오
영화열정의 시인 탁목나카무라 타마오다이에이시마 코지
드라마사랑, 믿고 싶소이다후지마 리코NHK
연극울보 건방진 이시카와 탁목카나타니 시호리시스 컴퍼니2011년 공연[26]
역사비화 히스토리아카와시마 카이NHK


5. 1. 한국 문학과의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시인 백기행이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매우 좋아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에 '석(石)'이라는 이름을 붙여 백석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5. 2. 대중문화


  • 애니메이션 ''탐정사무소 우드패커''에는 허구적인 이시카와가 등장한다.[26]
  • 이시카와는 ''Fate/Grand Order'' X 히무로 월드 크로스오버 에피소드에서 마키데라 카에데의 몸을 빌린 가짜 서번트로 소환된다.
  • 이시카와는 또한 히지카타 도시조의 동맹으로 ''골든 카무이''에 등장한다.
  • 이시카와 다쿠보쿠(이시카와 하지메) 역을 맡은 배우는 다음과 같다.


작품 종류작품 제목배우제작사감독비고
영화‘열정의 시인 탁목 고향편’시마 코지닛카쓰쿠마가야 히사토라
영화‘구름은 천재다’이케베 요시기획만. 크랭크인 전에 제1차 도호 노동쟁의로 제작 중단. 쇼치쿠, 도호의 경쟁 작품. 쇼치쿠 감독: 아시하라 마사시, 도호 감독: 야마모토 사쓰오
영화‘우리는 울며 헤어졌다’와카하라 마사오쇼치쿠아시하라 마사시
영화‘젊은 날의 탁목 구름은 천재다’오카다 에이지신도호나카가와 신오
영화‘열정의 시인 탁목’혼고 코지로다이에이시마 코지
드라마‘사자처럼’쿠니히로 토미유키TBS1978년 8월 21일 방영
드라마‘사랑, 믿고 싶소이다’오쿠다 에이지NHK긴가 텔레비전 소설1981년 6월 방영
연극‘울보 건방진 이시카와 탁목’히라타 미츠루코마츠자1986년 초연, 작: 이노우에 히사시[26]
영화꽃의 난스나가와 신고도에이후카사쿠 킨지
연극‘막돼먹은 탁목’후지와라 타츠야미타니 코키2011년, 작·연출
연극‘울보 건방진 이시카와 탁목’이나가키 고로시스 컴퍼니단다 야스노리2011년 10월 공연[26]
드라마‘아시오에서 온 여자’와타나베 다이NHK2014년 1월 방영
역사비화 히스토리아미조바타 준페이NHK2016년 9월 16일 방영
연극“우리는 울며 헤어졌다~이시카와 탁목~”MARU사마 테쓰2015년 12월, 작: 히라야마 요
연극“덧없이도 또한, 슬프게도”MARU사마 테쓰2017년 12월, 작: 히라야마 요
영화‘이 길’콘도 후쿠HIGH BROW CINEMA사사베 키요시
애니메이션딱따구리 탐정처아사누마 신타로


  • 이시카와 세츠코 역을 맡은 배우는 다음과 같다.


작품 종류작품 제목배우제작사감독
영화‘열정의 시인 탁목 고향편’타키하나 쿠코닛카쓰쿠마가야 히사토라
영화‘구름은 천재다’이이노 키미코
영화‘우리는 울며 헤어졌다’츠시마 케이코쇼치쿠아시하라 마사시
영화‘젊은 날의 탁목 구름은 천재다’와카야마 세츠코신도호나카가와 신오
영화‘열정의 시인 탁목’나카무라 타마오다이에이시마 코지
드라마‘사랑, 믿고 싶소이다’후지마 리코NHK
연극‘울보 건방진 이시카와 탁목’카나타니 시호리시스 컴퍼니2011년 공연[26]
‘역사비화 히스토리아’카와시마 카이NHK


6. 기념 시설


  •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념관(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모리오카 다쿠보쿠·겐지 청춘관(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다쿠보쿠 신혼의 집(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미나토 분칸(홋카이도 구시로시)
  • 히지카타·다쿠보쿠 로망관(홋카이도 하코다테시) - 건물 노후화 등으로 2024년(레이와 6년) 10월 말에 폐관[21]
  • 이시카와 다쿠보쿠 소공원(홋카이도 하코다테시)

7. 각주

(출력값이 없습니다. 이전 결과가 이미 지시사항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참조

[1] 백과사전 Ishikawa Takuboku http://www.britannic[...] 2012-05-10
[2] 웹사이트 Illusions of Self: The Life and Poetry of Ishikawa Takuboku https://apjjf.org/Ro[...]
[3] Kotobank 石川啄木 2022-02-06
[4] 서적 胡堂と啄木 双葉社 2019
[5] 서적 トリビアの泉?へぇの本? 5 講談社 2022-01
[6]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三省堂 2009
[7] 서적 石川啄木とその時代 おうふう 1995
[8] 웹사이트 啄木新婚の家 https://iwatetabi.jp[...] 2022-01-23
[9] 웹사이트 第3章 社会主義思想との邂逅 https://www.library.[...] 2022-01-29
[10] 서적 野口雨情 人と文学 勉誠出版 2013
[11] 서적 石川啄木全集 筑摩書房 1978
[12] 서적 石川啄木全集 筑摩書房 1978
[13] 서적 啄木全集 筑摩書房 1967
[14] 웹사이트 本郷喜之床 https://www.meijimur[...] 2022-01-24
[15] 웹사이트 青年に訴ふ クロポトキン 著,大杉栄 訳 1922 (大正11), 労働運動社 https://iss.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0-12-19
[16] 웹사이트 第10回企画展「啄木第一号歌碑建立物語」 https://www.mfca.jp/[...]
[17] 학술지 学芸員メモ 「土佐と啄木」―今回の展示の中から― https://www.kochi-bu[...] 高知県立文学館 1999-10-01
[18] 뉴스 津波で2度流失…陸前高田の啄木歌碑再建 https://web.archive.[...] 2013-11-15
[19] 서적 石川啄木全集 筑摩書房 1978
[20] 서적 石川啄木全集 筑摩書房 1978
[21] 웹사이트 土方・啄木浪漫館、ファンへ感謝 10月27日閉館前イベント https://www.hokkaido[...] 北海道新聞 2024-09-19
[22] 서적 トリビアの泉?へぇの本? 9 講談社 2022-02
[23] 웹사이트 北海道新聞:啄木の風景 <8> 借金編 素顔の啄木像 ―石川啄木研究者・桜井健治さんに聞く http://www5.hokkaido[...] 2022-02
[24] 서적 文豪たちの噓つき本 彩図社 2023
[25] 특허 商標公告昭37-017888 https://www.j-platpa[...]
[26] 뉴스 シス・カンパニー「泣き虫なまいき石川啄木」作者井上ひさしとの苦悩の二重唱 https://style.nikkei[...] 2011-10-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